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드난 멘데레스 (문단 편집) === 전성기 === 멘데레스는 총리에 집권한 뒤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던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대한민국을 기습 침공하면서 [[6.25 전쟁]]이 발발하자, 멘데레스는 [[국제연합]]의 대한민국 지원을 결정한 안보리 결의 83호에 신속하게 호응해 1만 5천 명에 달하는 병력을 한국으로 파견했다. 이는 유엔군 중 4위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튀르키예군은 한국 전쟁 기간 동안 966명이 전사하고 2천여 명이 부상당하는 등 상당한 손실을 입었고, 군부와 케말주의자들은 머나먼 국가에서 벌어진 전쟁에 귀한 병력을 파견해 쓸데없이 피를 흘리게 한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멘데레스는 이러한 불만을 일축했다. >"나는 이 민족을 위해서라면 세 아들을 전선으로 보내는 데에 단 3초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오!" 1952년, 미국은 튀르키예가 6.25 전쟁에 적극 참여해준 것을 보답하기 위해 나토에 가입시키고 경제 원조를 대대적으로 해줬다. 멘데레스는 이 덕분에 자신들이 원하는 경제정책을 집행하기 위한 충분한 자본을 확보할 수 있었다. 멘데레스는 이 자본금으로 수십년 동안 외면받아온 튀르키예 농촌에 막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그는 농업 현대화와 기계화를 위해 트랙터를 수입했으며, 튀르키예 내륙 곳곳을 이어주는 도로망을 대폭 확장했으며, 수리시설 역시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이로서 농민들은 이전보다 훨씬 광대한 시장에 농작물을 팔 수 있게 되었으며, 1950년부터 1953년까지 기록적인 풍작을 기록했다. 과거 대표적인 식량 수입국이었던 튀르키예는 이제 세계적인 밀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농업에서의 성공 덕분에, 튀르키예는 연간 11~13%의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며 농민들 역시 이러한 호황으로 큰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멘데레스는 여세를 몰아 공화인민당이 집권 수십년간 밀어붙여온 세속주의 정책을 완화시켰다. 하루 다섯 번 기도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에잔(ezan)을 아랍어로 낭독하는 것을 허용했고[* 기존에는 종교서적과 모스크 내 설교, 쿠란 낭독, 에잔 모두 터키어로만 허용해왔다.], 종교 교육기관과 모스크의 건립을 허락했고, 코란을 비롯한 종교 서적의 출판도 허용했다. 이로서 그동안 족쇄에 걸렸던 이슬람교는 자유로워졌고,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다수의 튀르키예 국민들은 멘데레스를 열성적으로 지지했다. 이렇듯 경제 호황과 이슬람교의 부활을 이끌어낸 멘데레스는 1954년 재선을 가뿐하게 달성했다. 민주당은 58%의 득표율을 확보하고 의회 의석을 503석이나 확보했다. 반면 공화인민당은 31석만 획득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